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미국 독립 전쟁 (문단 편집) == 프랑스의 지원 == 이 당시 전문적으로 세세한 부분을 따져보지 않고 표면적인 부분만 봤다면 이렇게 '''오해'''하기 쉽겠지만 실상은 좀 다르다. 프랑스가 영국에 대해 열등감을 가진 것 자체는 맞고 프랑스 자체적으로 이를 극복할만한 수단이 없던 것도 사실이며 미국의 독립 전쟁이 이 수단이 되어줄 수 있기에 프랑스가 상당히 지원해준 것도 사실이지만 오히려 협상 자체는 언제나 '''프랑스'''가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 프랑스에 협상가로 찾아왔던건 [[벤자민 프랭클린]]인데, 이들의 상대로 프랑스측에서 내보낸 인물은 외무장관인 '샤를 그라비에 베르젠'이라는 닳고 닳은 [[정치인]] 겸 협상가였다. 이 당시 정치 초짜인 미국과 왕조가 여러번 바뀌면서도 기틀은 유지했던 정치 고인물인 프랑스의 위치를 보자면 [[토끼]] 하나 잡자고 [[사자]]를 보낸 격. 실제로 벤자민과 사절단이 울고불고 사정해도, 현 상황과 프랑스의 열등감을 꼬집어 그를 감정적으로 만들려 해도, 다 안먹히자 '''반쯤 협박인 행위'''까지 할 수 있는 수란 수는 다 쓰고도 베르젠은 끄떡도 안하고 본래 자신이 생각했던 범위인 통상 조약, 동맹, 원조, 차관만 확약하고 선을 딱 그었으며 심지어 이후 이미 추가 지원군을 '''파병시켜주고 있는 와중'''에도 물질적 지원이 아닌 지원군 [[파병]]을 요청하는 미국측에게 계속 답을 미루는 척하는등 협상 자체는 시종일관 벤자민이 베르젠에게 끌려다니는 모양새였다. 벤자민이 프랑스에서 영국에 대한 [[영불관계|열등감]]과 [[친미]] 여론을 고조시켰던건 효과적인 한 수고 뭐고간에 '''베르젠을 상대론 아무것도 안먹혀서''' 그나마 시민들 상대로 어그로라도 끌어서 프랑스 정부를 약간이라도 움직여보자는 생각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것도 '협상하라고 보냈는데 인기몰이나 하고 있냐' 라는 식으로 동료와 의원들의 거센 비난을 감수해야만 했고 중간에 [[파면]]당하기까지 했다. 벤자민 입장에선 다행히도(?) 벤자민의 후임으로 찾아온 [[존 애덤스]]는 오히려 그 고집불통인 면모 때문에 베르젠에게서 뭘 더 얻어내기는 커녕 까일대로 까이고 베르젠이 몰래 미국 정부에 압박 준 것으로 인해 인사이동당해야 했다.] 심지어 종전까지도 프랑스는 현대에서 일반인들이 착각한 것과 달리 '나라가 흔들릴 정도'의 지원을 보낸 적은 없다. 미국이 처음 들고 일어날 때부터 첩보원들을 보내 몰래 관찰한 것을 시작으로 렉싱턴-콩코드 전투 이후 미국의 독립이 아예 무리수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서 '중립'을 표방하는 한편 뒤로는 물질적 지원을 해주고 있었고[* 다만 이 때는 해군전력이 영국보다 확실히 열세라 한창 해군을 키우느라 움츠리고 있던 시기인 것도 한몫했다.] 트렌턴, 새러토가 전투 이후 생각보다 미국이 분전하는 걸 보고 스페인까지 끌여들여 미국-프랑스-스페인 3자동맹을 결성시켰으며[* 정확히는 미국과 프랑스 둘이 직접적인 동맹을 맺었고 지브롤터 때문에 영국에게 물먹은 적이 있는 스페인은 '프랑스 지원'이라는 명분으로 참여했다.] 이 이후에 지원군을 파병시켰지만 이조차 종전 때까지 영국이 미국 영토에 보낸 군사의 절반도 안된다. 실제로 미국 독립작전에 대한 실질적인 책임자는 '''외무장관'''이자 프랑스측의 협상가로 참여했던 '샤를 베르젠'이었는데 이는 국가의 수령이 아닌, 외무장관 선에서 처리가 가능할 정도로만 지원해줬다는 뜻이 된다.[* 영국은 반대로 왕인 조지 3세가 직접 참여해서 인선이나 파병 병력 등 전쟁에 관련된 대부분을 자기가 직접 조정했다.] 다만 이 때 영국과 프랑스는 각각 예상 못한 몇가지가 있었고 이게 결국 양국 모두에게 나름 큰 악영향을 끼쳤다. 먼저 영국은 미국의 전력을 너무 낮게 잡았다. 실제로 그 당시 미국도 여러가지 내적 문제를 품은 상황이긴 했지만[* 제일 대표적인 문제는 미'''군'''이 가난했지 미'''국'''이 가난하진 않았다는 것. 언뜻 보면 전쟁통에 이게 뭔 소린가 싶겠지만 이 당시 미국은 현재같이 중앙권력이 강하기보단 어찌저찌 기워낸 것에 가까울 정도로 중앙정부가 각 주의 정부에 행사하는 그 지배력이 크지 않았다. 당장 어느날 조지 워싱턴이 의회에 가던 중에 미군이 굶어가며 영국군과 목숨걸고 싸우는 와중에도 필라델피아의 시민들이 태연하게 사치를 즐기며 호화스럽게 사는걸 보면서 골때려하며 기록을 남길 정도였고, 미국을 지원하러 파병된 유럽인들이 '이렇게 잘먹고 잘살면서 반란? 제정신이야?' 라면서 충격을 받을 정도였다. 최소한 미국 서민들의 식생활은 유럽 중산층보다 위였던 것이다.] 영국이 그걸 알고 있었는지는 몰라도 전쟁 초반 영국은 13개 식민지에서 일어난 반란을 '조금만 밟아주면 알아서 사그라질 아랫 것들의 사소한 반항' 정도로 치부했다. 결국 강경책으로 나가면서도 처음부터 전력을 쏟아부어 속전속결로 끝내지 않았고 그 결과 이 당시 저력으로는 세계 [[초강대국|최상위]]에 속하던 영국이, 식민지가 일으킨 반란 하나를 빠르게 정리하긴 커녕 승패를 주고 받으며 고착상태가 되게 만들었다. 이는 곧 기회를 보던 프랑스와 (프랑스가 데려온) 스페인이 '한번 해볼만 한데?'라고 생각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고, 거기에 영국측이 보낸 군대의 수뇌부인 '찰스 콘월리스'와 '헨리 클린턴'이 각각 큰 실책들을 저지르면서 패색이 짙어지고 결국 패배를 인정, 이로서 북미 13개주라는 광대한 식민지를 상실함은 물론, 프랑스와 스페인에게도 별개로 식민지를 어느정도 내주는 고배를 마셔야만 했다. 13식민지의 인구나 경제력만 봐도 당장 대영제국의 대도시 중 2개가 13식민지에 있었음을 고려하면, 영국은 수천km 바깥에 위치한, 거대한 농업지대+열강급 대도시를 가진 반란군을 진압할 골든타임을 놓쳤다고밖에 할 수 없다. 프랑스 쪽에도 문제는 있었는데, 대표적으로 '''전쟁이 '지나치게' 장기화된 것'''과 '''대륙회의의 지배력이 각 주 정부들을 하나로 모을 정도로 강하진 못했다는 것'''이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군수물자와 돈은 더욱 필요해졌는데 대륙회의가 닥달해도 주 정부들이 계속 소극적으로만 지원하니까 결국 미국 독립 세력도 프랑스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프랑스 역시 이제 와서 전쟁에서 빠질 수도 없는 처지라 지원을 할 수 밖에 없게 됐는데 이게 아직 국력을 완전히 회복하진 못한 프랑스 입장에선 나름 타격이 되었다. 심지어 종전 이후에 미국에 파견되었던 프랑스 장교와 병사들이 '''자유와 박애 정신'''을 배워 프랑스 본국에 퍼트렸고 이건 '''[[프랑스 혁명|중앙 정부도 감당할 수 없는 폭탄]]'''이 되었다.[* 원정 갔던 군인들의 사상수입은 특이한 게 아니어서, [[나폴레옹 전쟁]]에 참전했던 러시아 제국 장교들 중 일부도 귀국 후 어설프게 [[데카브리스트의 난|혁명]]을 시도했다가 진압당했다.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도 마찬가지였고] 다만 프랑스 '왕국'은 몰라도 프랑스 입장에선 프랑스 자체의 멸망을 우려할 정도의 일은 끝내 없었고, 독립 전쟁이 승리하며 영국에 역사상 유례가 없는 빅엿을 먹일 수 있었기 때문에 어쨌든 참전한 목표는 100% 이상 이룬 셈이다. 실제로 이 일을 기억하고 있는 프랑스는 이후 미국 독립 100주년 기념 선물로 그 유명한 '''[[자유의 여신상]]'''을 선물로 보내줬을 정도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